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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10 김난도 교수 (3)
  2. 2011/02/02 tvN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 - 김윤아 (11)
  3. 2010/03/25 20대는 왜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 (2)
  4. 2009/10/21 배우 김민선은 우리들의 대역
Blog/Scrap2011/04/1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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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민선은 우리들의 대역  (0) 200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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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민선은 우리들의 대역  (0) 2009/10/21
Posted by Sang-il
Blog/Scrap2010/03/25 22:53

속물주의, 탈정치화 아닌 정치적 계몽의 산물
좌파 언어 탁월해져야 세대의 계급화 가능

 세대는 계급을 대체했는가? 요즘 사회과학에서 유행하는 담론을 찾아본다면 확실히 세대는 계급을 대체한 듯이 보인다. ‘88만원 세대’라는 담론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비정규직이나 실업이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다. 마치 한 세대 전체 혹은 절대다수가 ‘잉여인간’이라는 동일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버린 듯한 강렬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현실 투쟁에서도 계급을 대체하는 듯한 세대 담론이 가진 물리적인 힘은 세계 곳곳에서 검증되고 있다. 2006년 프랑스 청년들의 대규모 노동법 개악 반대 시위에서부터 2008년 그리스의 반정부 시위는 명백하게 청년층이 주도했으며 시위의 주제 또한 청년실업과 직결됐다. 서구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이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홍콩의 거리에 갑자기 나타나, 중국 본토와 연결하는 초고속열차 때문에 삶터에서 쫓겨나는 사람들과의 강력한 연대를 주장하며 비타협적 시위를 주도한 것도 ‘80년후’ 세대라고 불리던 청년들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적대의 전선이 분명히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세대의 문제로 전이된 것처럼 보인다.

  세대는 저절로 투표하지 않아



 그러나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흔히 불러일으키는 오해처럼 경제적 영역에서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 영역에서 ‘노동 없는 가치 창출’ 혹은 ‘노동의 일회성화’라는 자본 축적 방식의 변화에 따라 한 세대 전체가 졸지에 노동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될 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적대 전선이 자본과 조직화될 수도 없는 잠재적 노동으로서 청년 세대 사이의 문제로 전환한 것이다. 문제는 이 경제적 적대가 바로 정치적 투쟁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급이 자동적으로 투표하지 않는 것처럼 세대도 저절로 투표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가 한국의 20대다. 지난 촛불 시위에서도 고등학생까지 거리에 뛰쳐나오는데 왜 20대와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 많았다. 이 때문에 20대에 대한 고전적 탈정치화론에서부터 보수화론까지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20대들은 자신이 언제든 잉여인간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프랑스나 그리스, 홍콩에서처럼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88만원 세대론이 보수주의 언론에 의해 왜곡되어 쓰이는 것처럼 자본과 세대 간의 적대가 세대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어 나타날 수 있다. 이때 작용하는 것이 ‘문화’이다. 경제는 문화를 관통할 때만 정치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88만원 세대가 처한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감각이다.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세대가 계급을 사유하고/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각이 만들어진 것이다. 스펙터클의 사회와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지금의 20대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속물’이다. 그리고 이 ‘속물’들이 도덕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세상에 대한 태도는 ‘냉소주의’인 것이다. 인간 모두가 속물인 사회에서 무한경쟁은 인간의 숙명이 되어버린다. 만약 무한경쟁이 인간의 본성이며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를 반대하는 이른바 ‘가치’라는 것은 냉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 

 대학생이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학기에 강의를 하던 한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본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에 대한 토론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통치하려고 한다. 이런 통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으며 진실은 누군가를 통해서 밝혀지며 우매한 것처럼 보이는 대중은 진실에 감응되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 학생이 만든 엔딩 크레디트 이후의 시나리오였다. 독재의 붕괴 이후 민주정부가 곧 들어서지만 정책적 무능으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때맞춰 미디어에서는 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브이’라는 영웅의 사생활을 캐고 온갖 스캔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한다. 혼란을 틈타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던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고 대중 사이에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결국 사회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학생의 주장에서 만나게 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치에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냉소했다.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며,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독일의 문제적 철학자 슬로터다이크의 논법을 따르자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미각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치에 대해 계몽된 존재인 셈이다. 이들은 정치를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졌고 모든 가치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 장비(1)가 되는 셈이다. 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가 단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도덕의 냉소주의가 만들어내는 속물의 정치이다. 가치의 종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속물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이명박이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이명박을 지지한 20대 대부분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서 지지한 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치를 이야기하면 오히려 냉소한다. 

   속물인가, 속물이 돼야만 하는가

 실로 우리는 속물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미디어에서 성공하고 있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은 대부분 우리가 얼마나 속물인가를 과장해 까발리는 내용이다. 얼마 전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어모은 tvN의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를 생각해보자. 남성의 전형으로 나오는 정형돈은 쉽게 말하면 찌질이 혹은 진상이다.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예쁜 여자와 축구뿐이며 나머지에 대해서는 귀찮아할 뿐이고 제대로 일처리를 하는 것 하나 없다. 이에 반해 여성의 전형으로 제시된 정가은은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멍청한 남자친구를 여우 짓을 통해 후려 처먹는 것이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품백’밖에 없는 된장녀다. <개그콘서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리얼리티쇼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20대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허벅지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꿀벅지’라고 불렀을 때 자신의 존엄이 침해되었다고 항의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호명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상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야 한다.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 자신은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꿀벅지’에 이어 ‘말벅지’가 등장했다. 송일국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말벅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내 스스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내고 스펙터클로 치장해야 한다. 스펙터클의 바깥은 없다. 심지어 이번 중학생들의 졸업식 알몸 사건처럼 내가 남을 때리는 것조차도 인터넷에 올려 자랑을 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나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 아니라 속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좌파가 가장 패착하고 있는 부분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보수주의자들에게 지고 있다. 이 문화 전쟁에서 실패한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영국의 사례다. 1972년 11월 5일 영국 버밍엄의 빈민가 핸즈워스에서 유색인종 청소년 3명이  백인 노동자 1명을 구타하고 돈을 빼앗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언론에서 ‘강도 사건’으로 대서특필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영국이 도덕적 위기에 빠졌으며 법과 질서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질서의 적은 바로 이주노동자였으며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옷차림과 언어를 즐기는 청소년이었다. 위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노동당의 무능이 고발되었다. 한편 미조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다수의 노동자가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이 장악한 노동당에 등을 돌렸다. 대신 그들은 국가를 도덕적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대처주의의 언어에 동의했다. 이것이 영국에서 전후의 합의에 바탕을 둔 조합주의적 정치가 강압적인 법과 질서 중심의 대처주의로 넘어가는 배경이었다. 노동당은 투표에서 진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대처에게 진 것이다.

여기가 우리의 로두스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이때의 영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좌파들이 구사하는 대다수 언어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알아버린 20대에게는 냉소주의만을 더 강화하는 진부한 성명서 언어만을 반복하는 패착에 빠져 있다. 한국 좌파의 언어에는 정치에 지나치게 계몽된 지금 20대의 냉소적 앎을 압도할 수 있는 ‘탁월함’이 없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진보 정당이나 노동조합, 시민단체의 모임과 뒤풀이는 여전히 80년대의 계보학과 ‘깔대기 이론’으로 사람을 녹다운시키고 있다. 탁월함. 이것이 속물과 냉소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핵심어다. 희망은 이 20대가 여전히 탁월함에 대해서 감동받고 영감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김연아를 능가하는 스펙터클로서의 탁월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과 삶의 가치에 대한 탁월함은 사이버공간의 웹툰이나 아고라같이 고전적 좌파들이 거의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대가 ‘계급’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고전적 좌파’의 언어가 20대와 단절된 것이다. 속물주의와 냉소주의에 맞서는 좌파의 탁월한 언어가 필요하다. 좌파끼리 만나는 성명성의 언어가 아니라 좌파와 대중, 특히 20대와 만나는 좌파의 상식에 대한 언어, 그것이 우리의 로두스이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글•엄기호
연세대 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우리신학연구소와 인권연구소 창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닥쳐라, 세계화>(당대·2008),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낮은산·2009) 등을 썼다. 

<각주>
(1) 슬로터다이크의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 대한 이진우의 발문 19~20쪽 참조.

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711



20대를 비판하기보다 분석한 글.
사실 우리 20대는 지켜야할게 많은 기득권도 아니고, 쉽게 세상이 변할 것이라 믿지도 않는다 .
특히 2007 대선에서 어차피 이명박이라는 현실에 투표를 하지 않은 친구들이 허다하고,
다른 나머지 후보들의 대선 후폭풍.. 그리고 전대통령의 자살.

냉소주의라..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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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Scrap2009/10/21 19:46
배우 김민선은 우리들의 대역

‘늑대와 양의 우화’ 연상시키는 강자들의 일벌백계 논리
사적 이해를 공적 정의로 확인받는 ‘소송사회’의 자화상

[12호] 2009년 09월 03일 (목) 17:05:25 정정훈 |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 info@ilemonde.com

어린 양 한 마리가 시냇물에 목을 축이고 있었다. 갑자기 허기진 늑대가 나타나서 묻는다. “누가 건방지게 내가 마실 물을 흙탕으로 만들라고 널 부추겼지?” 양의 변론이 이어진다. 당신보다 스무 발자국 밑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으므로 물을 더럽힐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자 늑대는 말한다. “난 네 녀석이 작년에도 날 비방한 걸 알아.” 다시 양은 “그때는 엄마 젖도 떼지 못했다”고 변호하지만, 늑대는 그래도 너의 형제이거나 부모일 것이라며, “반드시 내 손으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는 말과 함께 그 어린 양을 먹어치운다. “가장 강한 자의 이성이 항상 최선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이 우화의 끝은 “그 밖의 다른 재판은 없었다”는 말로 맺고 있다.

17세기 프랑스 시인 라퐁텐의 ‘늑대와 양의 우화’는 개울가에서 벌어진 재판 형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재판에서 인과관계의 증명(하류에서 상류의 물을 더럽힐 수는 없다)이나 불법 행위의 부재(어려서 말을 할 수 없었다)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강자의 논리가 있고, 그 논리에 도구적으로 동원되는 재판 절차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늑대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동원하는 양에 대한 단죄의 이유가 ‘건방지게’ 물을 흐린 것이고, 작년의 비방 때문이라는 것이다.


▲ 17세기 초 유럽의 마녀사냥 모습을 그린 삽화.

봉건사회에 대한 이 17세기의 우화는 자본주의의 최첨단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우스꽝스럽게 재현되고 있다. 배우 김민선에 대한 소송, 지난해 ‘버르장머리’ 없는 말로 시장의 물을 흐린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의 책임을 묻는 이 소송은 ‘촛불’ 이후 우리 사회의 현재를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수의 법률 전문가들이 민사소송에서 최소한의 요건, 즉 손해, 불법 행위, 인과관계가 입증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이 소송은 차라리 자본주의 최첨단의 우화인 한 편의 광고(CF)로 보는 것이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법정을 세트로 연출되는 광고, 모델 김민선, 연출·기획 에이미트, 메인 콘셉트는 ‘버르장머리 길들이기’, 주요 광고 효과는 반면교사, 일벌백계를 통해 수입 쇠고기의 안전성을 홍보하는 것이지만 부수적인 효과들도 꽤 상당할 것이다.

목동과 양떼가 물러선 후의 희생양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지난해 사건을 문제 삼으며 배우 김민선을 이 의심스러운 소송·광고의 피고·모델로 캐스팅했는지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그 대답은 아마도 이렇다.


우선 왜 지금인가? 촛불이 꺼졌기 때문이다.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드라.” 영화 <짝패>에서 이범수의 날렵한 대사에 의하면, 오래가서 강한 쪽은 수입 쇠고기의 안전성에 내기를 걸었던 이들이다. 광장에서 시민들이 철수하고, 생활의 이유로 상당수 시민들이 수입 쇠고기를 먹고 있다. ‘시간의 정치’에서 승리함으로써 확인된 힘을, 다시 소송을 통해 법적 정의로 인정받으려는 의도가 그것이다. 연일 광장에 촛불이 켜지던 당시라면, 이런 소송은 제기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양떼도 양을 지킬 목동도 없는 현재의 상황이 이런 무모한 소송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한때 광장의 주체들이던 우리는 책임과 위험을 나눌 의무가 있다.

‘소비자’라는 촛불 주체의 상징성 봉쇄

공적 관심사나 사회적 중요성이 있는 문제에 관해 정부의 행위나 결과에 영향을 주기 위한 의사 전달을 이유로 시민단체나 개인을 상대로 제기되는 민사소송을 ‘전략적 봉쇄소송’이라고 한다. 이러한 소송의 특징을 명확히 하기 위해, 제소된 상대방을 ‘피고’(defendant)가 아닌 ‘피소자’(target)라고 부른다.

왜 배우 김민선이 촛불 이후 전략적 봉쇄의 타깃으로 선정됐는가?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스타마케팅’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그 과정을 따지고 들어가면, 촛불 주체에 대한 단죄와 봉쇄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배우 김민선이 선택된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는 지점이 있기도 한다.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거대한 법정’이 돼버렸다. 촛불 이후는 ‘법의 지배’가 ‘법을 통한 지배’로 변질된 단죄의 과정이었고, 법을 명분으로 민주주의적 요구를 봉쇄하는 ‘MB식 법치주의’의 과정이었다. 다양한 촛불 주체들이 법의 단죄와 봉쇄 대상이 되었다. 거리의 시민과 단체 활동가에게는 도로교통법과 집시법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됐고, ‘미네르바’ 같은 네티즌이나 ‘집단 휴교’ 문자를 돌린 학생에게는 전기통신기본법이 과잉 적용돼 결과적으로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을 이끌던 목적적인 소비자운동에는 업무방해죄의 유죄판결이 선고됐고, 비판적인 언론 보도를 한 <PD수첩>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이렇듯 시민·활동가·네티즌·학생·소비자운동·언론·공무원·노조 등 촛불의 상징적 주체들에 대한 단죄와 봉쇄가 시도된 이후, 아직 법적으로 단죄의 시도가 이뤄지지 않은 마지막 상징적 주체는 ‘엄마’와 ‘소비자 개인’이다.

‘유모차 부대’에 대한 아동학대 혐의 적용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엄마’라는 상징성은 단죄와 봉쇄의 시도가 부담스럽고, 더욱이 체제에 위협이 되는 주체로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소비자운동은 그 기본적 형태가 체제 내적인 것인지 여부를 떠나서, 잠재적으로는 체제에 상당한 부담이 되는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 소비자운동이 ‘입장을 바꾼 노동자운동’(가라타니 고진)으로 전화하거나, 유통 과정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면, 그 잠재력은 현실적인 힘을 획득할 수도 있다. 많은 평자들은 촛불시위의 한계로서 그 주체가 조직되지 않은 소비자·시민에 제한된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촛불 이후 성장하는 불매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주체상의 한계는 역설적으로 하나의 긍정적 결실을 맺고 있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 성장하는 소비자운동과 ‘소비자 개인’을 분리시킬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지점에서, 배우 김민선에 대한 소송은 제소자의 주관적인 의도를 떠나서 사회적으로 소비·배치된다. 그는 배우라는 대중성 때문에 ‘소비자 개인’이라는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과잉 위임받고 선택된 것이다. 말하자면 김민선은, ‘소비자 개인’인 우리를 대신해 법정이라는 무대 위에 세워진 대역이다.

촛불을 진화하는 데 눈부신 활약을 보였던 검찰권력도 법리적 한계와 민주주의적 명분상의 취약함으로 인해 촛불의 최대 주체였던 ‘소비자 개인’에 대한 단죄·봉쇄는 할 수 없었다. 검찰권력이 공백으로 남겨둔 지점을 기업권력이 적극적으로 메운다는 점에서 김민선에 대한 소송은 상징적이다.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 선언에 대한 국가권력의 대응이 형법을 적용한 기소였듯이, 소비자 주권의 선언에는 기업권력에 의한 민법상의 제소가 짝을 이루는 것이다.

배우 김민선의 ‘버르장머리 고치기’는 ‘소비자 길들이기’와 동전의 앞뒷면이다. 우리 모두가 소비자라는 점에서, 이번 소송은 우리 사회 전체를 ‘피소자’로 한 소송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표면적인 경고는 발언의 한계를 넘지 말라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소비자 주권은 ‘선택의 자유’라는 경계를 넘을 수 없다는 우리의 주권에 대한 한계 설정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시장 검열(경제적 검열)의 부과다.

공론장에서 법정으로 쫓겨간 정의

데리다의 저작 <법의 힘>은 위 ‘늑대와 양의 우화’를 언급하며, 라퐁텐의 문제의식을 “힘이 법을 만든다”로 요약한다. 영화 <짝패>에서 이범수의 대사를 다시 조금 고쳐 이야기하면, “정의로운 것이 법이 아니라, 힘이 곧 법이고 정의로운 거더라”쯤 될 수 있겠다. 논리적으로 우회할 필요가 없는 힘(조폭·늑대)의 세계는 간명하다. 그 간명함 속에서 진실의 한 단면이 드러난다.

법은 종종 ‘가면 쓴 권력’이라는 조롱을 받아왔지만, 오늘날 우리의 ‘법’은 더 자주 ‘정의’라는 가면을 불편해하며, 권력(힘)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낸다. “힘이 곧 법”이라는 조폭 논리를 버전 업그레이드하면, “법이 곧 정의”라는 가짜 법치주의의 버전이 나온다. ‘힘=법’인 세상과 ‘법=정의’인 세상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배우 김민선에 대한 소송은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다. 정의를 거추장스러워하는 법과 힘, 법과 정의가 분리됨으로써 오히려 법 자체가 정의가 돼버린 사회, 정의가 공론장에서 논의되고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전문가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를 ‘소송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가 검경 각본의 무대 위에 상연되는 인형놀이가 돼가는 것도, 나는 “법이 곧 정의”라고 여기는 가짜 법치주의 버전의 소송사회가 그 원인이라고 평가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물신화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도 공론장에서 만개해야 할 정의가 법정의 메마른 공간에서 시들어가는 ‘소송사회’적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버르장머리 길들이기’라는 이 광고 같은 소송이 법정 절차를 통해서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정의’로 확인받으려는 것 역시 소송사회의 차가운 얼굴이다. 그리고 ‘소송사회’는 가짜 법치주의의 왜곡된 거울에 비춰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기사 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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